윌리엄 켄트리지-뭔가 싱숭생숭한 그의 "주변적 고찰"
- Teby Kim(김태엽)
- 2016년 2월 29일
- 4분 분량

흔히 "미술" 하면 떠오르는 것. 그게 바로 "철학" 혹은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관람객으로서 미술을 늘 그러한 형태로 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작품을 제작하는데 있어서 캔버스와 붓. 이 둘 외에는 별로 익숙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술가는 우리가 그러한 시각으로 보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사회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하며 고뇌한다. 그리고 고독해 한다. 고뇌와 고독. 이 두가지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마침내 작품이라는 두 글자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오늘 내가 보러간 작품 또한 고뇌와 고독이라는 이 두글자로부터 벋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 고뇌와 작품이. 그리고 주제가 약간 심오할 뿐이다.
................................................PERIPHERAL THINKING-WILLIAM KENTRIDGE(주변적 고찰-윌리엄 켄트리지)
흔히 남아공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남아공이란 이미지는 예전에 비해서 많이 밝아지고 아름다워 진것이다. 우사인 볼트. 요하네스버그, 월드컵.... 그러나 불과 몇십년전만 하더라도 남아공은 빈곤의 상징. 인종차별국가의 대표적인 예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곤 했다. 윌리엄 켄트리지는 그 속에서 고뇌를 했고 고독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저항했다.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의 흑,백 인종차별정책)에 맞서서.
윌리엄 켄트리지는 남아공을 대표하는 예술가로서 다양한 분야에 기반을 둔 그의 작품은 상보적이고 불가분의 선과 악이 만들어내는 복잡계를 창조했다고 설명서에서 밝히고 있다. 불가분의 선과 악이 많들어 내는 복잡계... 이것은 마치 어지러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다. 우리들은 그 속에서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 중간에 되어 그저 그렇게 애매하게 살아가고 있다. 윌리엄 켄트리지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본인이 당시 살았던 사회풍경. 그리고 그의 내면의식을 스토리 보드없이 전달하고 있다.
구경거리

-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전 2016 2월 24일 국립 현대 미술관-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윌리엄 켄트리지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지배적이었던 어지러운 시기의 남아공 속에서 자라왔다. 그래서 당연히 그의 작품속에서 종종 당시 사회의 순간적인 모습들이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그는 사회고발을 목적으로 작품활동을 한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망명중인 펠릭스-

뭔가 심오하고 알수 없었다. 켄트지에 목탄으로 그린 그의 그림에서 알 수 없는 우울함이 느껴졌다.
윌리엄 켄트리지는 "소호와 펠릭스" 연작으로 큰 명성을 쌓았다. 그는 백인 자본가이자 부동산 개발업자인 소호 엑스타인과 그의 부인, 그리고 부인과 연인관계에 있는 시인 펠릭스 타틀바움 세 명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회와 풍경,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과 고뇌를 보여준다. <망명중인 펠릭스>에서 부인이 떠난 집에서 소호는 자신이 일구어 놓은 풍경을 보며 쓸쓸함에 젖는다. 그런데 그는 왜 작품이름을 "망명 중인 펠릭스"라고 지었을까? 그의 연인이었던 부인을 따라 가는것일까? 아님 또 다른 새로운 사랑를 찾아 나서는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제목에 망명이라고 하지 않아도 됫을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소호와 펠릭스란 작품은 모두 원고나 스토리 보드 없이 제작된 작품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궁금증을 해결할 수 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뚜렷하지만 더이상 보이지 않는 부인을 향한 소호의 끊임없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아니고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전시실 입구에서부터 괴상한 소리가 난다, 그 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옆에 있는 검정색 작은 부스.
안에 들어가 보니 굉장히. 정말로. 지극히 부조합스러운 여덟개의 스크린이 따로 놀고 있었다.
이 작품은 켄트리지의 영상미술로 여덟개의 스크린을 사용하여 부조화스러운 각각의 다른 장면을 만들었다.
여덟개의 영화단상들로 이루어진 켄트리지의 렉쳐퍼포먼스와 다매제 설치로 구성된 이 작품은 컷 아웃, 프로젝션, 음악적 파노라마를 통해 상상과 그 감각을 확장한다.
분위기 역시 심오했다. 사람들은 스크린속에서 흥겹게 춤을 추지만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마치 고된 직장생활을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으로 풀어내는 우리나라의 아버지들의 의도와 같아보였다.
군인복장을 한 사람이 괴상한 폴카춤을 추고 있다. 또 다른 한 면에서는 코의 모양을 한 조형물을 뒤집어 쓴 채 뭐라고 계속 주저리고 있다. 그러다 다시 사라진다. 메세지를 파악하는데 꽤나 깊이 있는 통찰력을 요구하는 작품이었다. 결국 해설서를 봤는데 이 작품의 메세지는 다양한 매체의 사용으로 혼란스러운 사회적 관계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려한다는 것이었다.
흑인들에게 태양은 번영과 풍요로움의 상징대신 노동과 굶주림,그들 마음속에 켜켜히 싸여있는 서러움을 북어처럼 더 쪼들리게 하는 가장 무서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항상 밝아도 어두웠다. 햇살을 만끽하려고 등을 쫙 펴는 대신 노동을 하려고 허리를 숙여야 했고, 보이지 않는 어떠한 경계에 갇혀 가슴을 펼 수 도 없었을 것이다. 이 조항 하나때문에.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켄트리지는 이런 부조화스러운 화면들을 통해 결국 식민주의 압박과 갈등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페르소나

확실히 소호와 펠릭스는 켄트리지의 페르소나라는 느낌이 든다. 그는 백인, 흑인을 떠나서 아파르트헤이트뒤에서 그러한 학대를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방관자의 심정을 어지러운 그림들을 통해 표현했고 고뇌했다.
역동적이면서 비밀스러웠다. 그러면서 굉장히 매혹적이었다. 이 세작품을 우리집 서재에 걸어놓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맨 오른쪽 여자는 무엇에 그리 심취해 있는걸까? 신나는 음악소리에 맞취 고개를 돌리며 리듬을 타고 있는 것일까? 아님 남아공의 이분법적인 인종정책을 보지 않으려 회피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나는 그 반대로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힘들때마다 자기합리화를 하며 다양한 변명을 대면서 나의 마음상태, 상황등을 외면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이 작품이 현재 내가 말하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라는 메세지를 전달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이 그림, 맨 오른쪽 여자의 포즈를 보면서 이번에는 결코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회피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서워도 똑바로 보고 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전까지 나는 내를 믿을 수 밖에 없게끔 만반의 준비를 해야할 것이다. 겨울방학때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핸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철저히 할 것이다.

숨쉬는 코끼리

............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전 2016년2윌 24일 국립 현대 미술관(사진1)

"여러장르가 융합된 다층적인 예술세계를 선보여온 작가. 철학,역사,음악,영화,공연,미술등의 다영한 소재와 분야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 오후 4시 하이라이트 해설때 도슨트가 얘기한 내용이다. 도중에 지루해서 무리를 빠져나왔다. "뻔한 얘기를 왜저렇게 몰려다니면서 듣고 있지??.. 그냥 해설서에 보면 다 나오는 내용인데." 이렇게 생각하면서 전시실을 돌아다니다가 이 작품을 보았다. <시간의 거부>라는 작품. 카셀도큐멘타 13의 출품작의 일부 "숨쉬는 꼬끼리"라고. 여기서 전달하는 메세지는 철학적이었다. "과연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피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당연히 피할 수 없겠지. 싸이의 말처럼 "인생은 아무도 모르니까". 다만 그 운명이라는 속성을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있다)
에필로그.
미술관에 오면 그동안 놓쳤던 하고 싶었던 잡다한 생각들이 많이 든다. 그리고 그 생각들을 미술관에서 작품속에 또다른 나의 페르소나를 불러내어 얘기를 한다. 남들이 보면 싸이코 같다는 생각을 할 지도 모르지만, 이게 나의 취미생활인걸. 그래서 나는 늘 미술관에서는 애늙은이 철학자가 된다. 그동안 살아온 18년 인생을 되돌아 보고 인생철학을 설계한다. 그게 자습실에서 멍때리는 것보단 나을것 같아서. 오늘도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켄트리지의 주변적 고찰로 인해 나 또한 나의 주변 나의 상황을 두려워 하지 않고 똑바로 보게 되는 법을 배웠다. 오늘 이것 또한 앞으로 나의 삷에 있어서 또다른 하나의 모티브가 되겠지? 미술관을 나오면서 나는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수많은 불온한 생각들은 뒤로 던져버리고 나왔다. 밑의 켄트리지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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